'노자'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9.01.04 도덕경 54장
  2. 2009.01.03 하나란!
  3. 2008.12.01 하나란!
  4. 2008.11.22 "우주변화의 원리" 감상-6
  5. 2008.05.08 중화(中和)-道名(도명), 노자 도덕경
  6. 2008.04.18 카오스(chaos)와 도(道)
  7. 2008.04.11 황홀-깜박깜박(일원성)



제목: 도덕경 54장. 글쓴이: 고광근 날짜: 2007.01.18. 21:50:21

노자는 '노자 제54장'에서,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몸으로써 몸을 보고, 집으로써 집을 보고, 마을로써 마을을

보고, 나라로써 나라를 보고, 천하로서 천하를 본다)라고 物로서 物을 관찰

한다.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선건자불발, 선포자불탈, 자손이제사불철,

세상에서 세움을 선하게 한 자는 뽑히지 아니하고

품은 것이 선한 자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제를 바르게 하는 자손은 귾어짐없이 이어진다.


修之於身, 其德乃眞, 修之於家, 其德乃餘, 修之於鄕, 其德乃長,

수지어신, 기덕내진, 수지어가, 기덕내여, 수지어향, 기덕내장,

몸에서 (생각만이 아닌 말과 행동으로) 그것을 닦으니 그 덕이 참됨에 이르고

가정의 범위에서 그것을 닦으니 그 덕이 남음이 있음에 이르고

마을의 범위에서 그것을 닦으니 그덕이 크게 됨에 이르고


修之於國, 其德乃豊, 修之於天下, 其德乃普,

수지어국, 기덕내풍, 수지어천하, 기덕내보,

나라의 범위에서 그것을 닦으니 그 덕이 풍요롭게 됨에 이르고

천하의 범위에서 그 덖을 닥으니 그 덕은 보배로움에 이른다.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

고이신관신, 이가관가, 이향관향, 이국관국, 이천하관천하,

그러므로 몸에 관한 것으로서 몸을 관하고(몸에 대하여 닦아서 몸에 대해

알게 되어서 몸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바르고)

가정에 관한 것으로서 가정을 관하고(가정에 대하여 닦으니 가정사에 밝고)

마을에 대한 것으로서 마을을 관하고(마을에 대하여 닦으니 마을을 운영하는

것에 밝고)

나라에 관한 것으로서 나라를 관하고(나라에 대한 큰 뜻으로 닦으니 나라를

이끄는 일에 밝고)

천하에 관한 것으로서 천하를 관하고(천하를 꿈꿀만큼 된 자가 천하에 대해서

닦아서 천하를 바르게 하는 것에 밝음)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오하이지천하연재, 이차.

천하가 그러함을 아는 나는 어떻할까, 당연히 기금껏 말한 바와 같다.


* 그 옛날 도를 아는 자들끼리 접하지 못했던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불교나 유교에 도가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이것은 바로 천하를 관한 노자가 지금의 때를 준비한 것이다.

도덕이 땅에 떨어진 지금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지킨 자가 귀하다 할 것이다.

도덕이 아니고서 무엇으로 세상이 바로설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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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란!

하나의 동양학 2009. 1. 3. 18:37


제목: 하나란! 글쓴이: 보은고광근 날짜: 2006.12.30. 14:10:24

得一

노자는 '노자 제39장'에서,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하늘은 1을 얻어서 맑아지고, 땅은 1을 얻어서 안정되고, 신은 1을 얻어서 영험하게 되고, 계곡은 1을 얻어서 차고, 만물은 1을 얻어서 생겨나고, 후황은 1을 얻어서 천하의 중심이 되니,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得一을 설명한다.

**********************************************************************

하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나란 최초의 하나이거나 모든 것을 구비한 후에 하나처럼 된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천이 하나를 얻어서 맑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천이 하나를 얻었다는 것은 맑음도 탁함도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천은 맑음을 얻음으로서 하나를 얻게 된다는 혹은 하나가 된다는 말이

아닌가?

만물은 태어남으로서 처음의 하나가 된다는 말이 아닌가?

제후나 왕은 천하를 바르게 하는 것이 하나를 얻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제목: re: 하나란! 글쓴이: 안초 날짜: 2006.12.30. 17:29:01

좋은 화두 감사합니다. 아래는 제가 생각하는 화두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 학문인 카오스 이론은 만물을 하나로 집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카오스 이론

전수준은 '신과학에서 동양학으로'에서, "우리가 접하는 외부 사물은 매우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보인다. 이것을 하나하나 개별 요소로 분석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으며,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는 연결고리를 찾아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카오스 이론이다."라고 최첨단과학인 카오스 이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도 인간의 심리는 집합적 무의식에 의해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집합적 무의식

덴게 시로는 ‘超能力과 氣의 수수께끼에 도전 한다 제6장 심층 심리학으로부터의 접근’에서 “‘당신’도 ‘나’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 그것이 ‘무의식’인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이 하여 융의 ‘집합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이라는 사상이 확립되어 갔다.”라고 설명합니다.

우리 동양학도 결국은 하나를 추구합니다.

만사만물은 아무리 넓고 복잡해도 하나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一名(일명)

왕필은 '논어 리인장'에서, "夫事有歸 理有會 故得其歸 事雖殷大 可以一名擧 總其會 理雖博 可以至約窮也"(무릇 만사는 제자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듯 이치도 모이게 되어 있다. 고로 돌아가는 바를 알기만 하면 규모가 아무리 큰 것이라도 하나의 명칭으로 집약할 수 있다. 모이는 것을 종합하면 아무리 넓은 이치라 해도 간략한 방법을 궁리할 수 있다)라고 복잡한 만유라도 하나로 집약하면 아무리 넓어도 간략해 진다.

즉 아는 자는 하나로 말하지만 모르는 자는 끝이 없습니다.

一言

기백은 ‘황제내경 운기 六元正紀大論’ “知其要者, 一言而終; 不知其要, 流散無窮”(요지를 알면 하나의 말로 끝내지만, 요지를 모르면 흐르고 흩어져 끝이 없습니다)라고 요지를 하나로 말해야 한다.

2006.12.30. 안초




제목: re: re: 하나란! 글쓴이: 고광근 날짜: 2006.12.30. 18:35:52

노자는 '노자 제39장'에서,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하늘은 1을 얻어서 맑아지고, 땅은 1을 얻어서 안정되고, 신은 1을 얻어서 영험하게 되고, 계곡은 1을 얻어서 차고, 만물은 1을 얻어서 생겨나고, 후황은 1을 얻어서 천하의 중심이 되니,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得一을 설명한다.

위의 도덕경은 노자가 쓴 것이 아니고 노자 사후에 노자를 이해한 어떤 자가

쓴 것이라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십여년 전에 발견된 초간노자가 본래 도덕경이고 현재 널리 알려진 "도 가도

비상도"라고 하는 내용의 도덕경은 후대의 인물이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지만 아래의 글을 살펴보자면,

天得一以淸,

본래의 하늘 혹은 처음의 하늘을 의미하는 하나는 맑아짐으로 얻어진다.

地得一以寧,

땅은 편안해짐으로서 본래의 땅 혹은 처음의 땅의 상태를 얻는다.

神得一以靈,

신의 의미는 다양하게 변하여 왔는데, 최근에는 개별의식체를 대게 말하지만

크게는 정기신의 신으로서 우주에 의식이 나타나게 한 것을 총칭한다.

그리고 영은 정기신의 기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의식체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기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개별의식체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 정기신의 신은, 정기신의 기를 얻음으로서 정기신이 나오기 전의

하나의 상태를 얻게 된다.

谷得一以盈,

곡은 음양중 혹은 정기신을 하나로 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곡신은 그것의

의식체를 말하는 것이니 우주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곡은 하나로 보면 우주의식이고 부분으로 보면 부분의식인데, 사람도 곡의

부분을 가지고 있는 부분의식이다.

그러니 곡은 채워져서 큰 하나의 상태가 됨으로서 최초의 하나와 같은 모습을

얻게 되는 것이다.

萬物得一以生,

만물은 생겨남으로서 처음의 하나를 얻은 것이 된다.

侯王得一以爲天下貞,

왕은 지금의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고 이당시에는 천지인을 하나로 한 자로서

성인 혹은 각자와 같은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런 자가 세상을 조화롭게 통치하는 것은 세상이 다 원하는 것이다.

후는 왕이 다스리는 주변국가를 즉 제후국을 말한다.

그러니 제후나 왕은 천하를 바르게 함으로서 왕의 참됨을 얻은 것이 된다.

其致之.

지금까지 말한 이것들이 그것을(之) 이룸이다.

즉 도에 맞는 행위를 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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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란!

하나의 동양학 2008. 12. 1. 19:49



제목: 하나란! 글쓴이: 보은고광근 날짜: 2006.12.30. 14:10:24

得一

노자는 '노자 제39장'에서,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하늘은 1을 얻어서 맑아지고, 땅은 1을 얻어서 안정되고, 신은 1을 얻어서 영험하게 되고, 계곡은 1을 얻어서 차고, 만물은 1을 얻어서 생겨나고, 후황은 1을 얻어서 천하의 중심이 되니,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得一을 설명한다.

**********************************************************************

하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나란 최초의 하나이거나 모든 것을 구비한 후에 하나처럼 된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천이 하나를 얻어서 맑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천이 하나를 얻었다는 것은 맑음도 탁함도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천은 맑음을 얻음으로서 하나를 얻게 된다는 혹은 하나가 된다는 말이

아닌가?

만물은 태어남으로서 처음의 하나가 된다는 말이 아닌가?

제후나 왕은 천하를 바르게 하는 것이 하나를 얻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제목: re: 하나란! 글쓴이: 안초 날짜: 2006.12.30. 17:29:01

좋은 화두 감사합니다. 아래는 제가 생각하는 화두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최첨단 학문인 카오스 이론은 만물을 하나로 집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카오스 이론

전수준은 '신과학에서 동양학으로'에서, "우리가 접하는 외부 사물은 매우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보인다. 이것을 하나하나 개별 요소로 분석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으며,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는 연결고리를 찾아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카오스 이론이다."라고 최첨단과학인 카오스 이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도 인간의 심리는 집합적 무의식에 의해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집합적 무의식

덴게 시로는 ‘超能力과 氣의 수수께끼에 도전 한다 제6장 심층 심리학으로부터의 접근’에서 “‘당신’도 ‘나’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 그것이 ‘무의식’인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이 하여 융의 ‘집합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이라는 사상이 확립되어 갔다.”라고 설명합니다.

우리 동양학도 결국은 하나를 추구합니다.

만사만물은 아무리 넓고 복잡해도 하나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一名(일명)

왕필은 '논어 리인장'에서, "夫事有歸 理有會 故得其歸 事雖殷大 可以一名擧 總其會 理雖博 可以至約窮也"(무릇 만사는 제자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듯 이치도 모이게 되어 있다. 고로 돌아가는 바를 알기만 하면 규모가 아무리 큰 것이라도 하나의 명칭으로 집약할 수 있다. 모이는 것을 종합하면 아무리 넓은 이치라 해도 간략한 방법을 궁리할 수 있다)라고 복잡한 만유라도 하나로 집약하면 아무리 넓어도 간략해 진다.

즉 아는 자는 하나로 말하지만 모르는 자는 끝이 없습니다.

一言

기백은 ‘황제내경 운기 六元正紀大論’ “知其要者, 一言而終; 不知其要, 流散無窮”(요지를 알면 하나의 말로 끝내지만, 요지를 모르면 흐르고 흩어져 끝이 없습니다)라고 요지를 하나로 말해야 한다.

2006.12.30. 안초



제목: re: re: 하나란! 글쓴이: 고광근 날짜: 2006.12.30. 18:35:52

노자는 '노자 제39장'에서,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하늘은 1을 얻어서 맑아지고, 땅은 1을 얻어서 안정되고, 신은 1을 얻어서 영험하게 되고, 계곡은 1을 얻어서 차고, 만물은 1을 얻어서 생겨나고, 후황은 1을 얻어서 천하의 중심이 되니,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得一을 설명한다.

위의 도덕경은 노자가 쓴 것이 아니고 노자 사후에 노자를 이해한 어떤 자가

쓴 것이라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십여년 전에 발견된 초간노자가 본래 도덕경이고 현재 널리 알려진 "도 가도

비상도"라고 하는 내용의 도덕경은 후대의 인물이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지만 아래의 글을 살펴보자면,


天得一以淸,

본래의 하늘 혹은 처음의 하늘을 의미하는 하나는 맑아짐으로 얻어진다.

地得一以寧,

땅은 편안해짐으로서 본래의 땅 혹은 처음의 땅의 상태를 얻는다.


神得一以靈,

신의 의미는 다양하게 변하여 왔는데, 최근에는 개별의식체를 대게 말하지만

크게는 정기신의 신으로서 우주에 의식이 나타나게 한 것을 총칭한다.

그리고 영은 정기신의 기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의식체들을 의미하기도 하고

기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개별의식체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 정기신의 신은, 정기신의 기를 얻음으로서 정기신이 나오기 전의

하나의 상태를 얻게 된다.


谷得一以盈,

곡은 음양중 혹은 정기신을 하나로 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곡신은 그것의

의식체를 말하는 것이니 우주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곡은 하나로 보면 우주의식이고 부분으로 보면 부분의식인데, 사람도 곡의

부분을 가지고 있는 부분의식이다.

그러니 곡은 채워져서 큰 하나의 상태가 됨으로서 최초의 하나와 같은 모습을

얻게 되는 것이다.


萬物得一以生,

만물은 생겨남으로서 처음의 하나를 얻은 것이 된다.


侯王得一以爲天下貞,

왕은 지금의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고 이당시에는 천지인을 하나로 한 자로서

성인 혹은 각자와 같은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런 자가 세상을 조화롭게 통치하는 것은 세상이 다 원하는 것이다.

후는 왕이 다스리는 주변국가를 즉 제후국을 말한다.

그러니 제후나 왕은 천하를 바르게 함으로서 왕의 참됨을 얻은 것이 된다.


其致之.

지금까지 말한 이것들이 그것을(之) 이룸이다.

즉 도에 맞는 행위를 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제목: 도덕경 54장. 글쓴이: 고광근 날짜: 2007.01.18. 21:50:21

노자는 '노자 제54장'에서,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몸으로써 몸을 보고, 집으로써 집을 보고, 마을로써 마을을

보고, 나라로써 나라를 보고, 천하로서 천하를 본다)라고 物로서 物을 관찰

한다.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선건자불발, 선포자불탈, 자손이제사불철,

세상에서 세움을 선하게 한 자는 뽑히지 아니하고

품은 것이 선한 자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제를 바르게 하는 자손은 귾어짐없이 이어진다.


修之於身, 其德乃眞, 修之於家, 其德乃餘, 修之於鄕, 其德乃長,

수지어신, 기덕내진, 수지어가, 기덕내여, 수지어향, 기덕내장,

몸에서 (생각만이 아닌 말과 행동으로) 그것을 닦으니 그 덕이 참됨에 이르고

가정의 범위에서 그것을 닦으니 그 덕이 남음이 있음에 이르고

마을의 범위에서 그것을 닦으니 그덕이 크게 됨에 이르고


修之於國, 其德乃豊, 修之於天下, 其德乃普,

수지어국, 기덕내풍, 수지어천하, 기덕내보,

나라의 범위에서 그것을 닦으니 그 덕이 풍요롭게 됨에 이르고

천하의 범위에서 그 덖을 닥으니 그 덕은 보배로움에 이른다.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

고이신관신, 이가관가, 이향관향, 이국관국, 이천하관천하,

그러므로 몸에 관한 것으로서 몸을 관하고(몸에 대하여 닦아서 몸에 대해

알게 되어서 몸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바르고)

가정에 관한 것으로서 가정을 관하고(가정에 대하여 닦으니 가정사에 밝고)

마을에 대한 것으로서 마을을 관하고(마을에 대하여 닦으니 마을을 운영하는

것에 밝고)

나라에 관한 것으로서 나라를 관하고(나라에 대한 큰 뜻으로 닦으니 나라를

이끄는 일에 밝고)

천하에 관한 것으로서 천하를 관하고(천하를 꿈꿀만큼 된 자가 천하에 대해서

닦아서 천하를 바르게 하는 것에 밝음)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오하이지천하연재, 이차.

천하가 그러함을 아는 나는 어떻할까, 당연히 기금껏 말한 바와 같다.

* 그 옛날 도를 아는 자들끼리 접하지 못했던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불교나 유교에 도가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

이것은 바로 천하를 관한 노자가 지금의 때를 준비한 것이다.

도덕이 땅에 떨어진 지금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지킨 자가 귀하다 할 것이다.

도덕이 아니고서 무엇으로 세상이 바로설 수가 있겠는가!

Posted by 무중 이승수 지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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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주변화의 원리" 감상-6 글쓴이: 중도 날짜: 2006.09.11. 19:25:24

아래 글은 구름 이경숙님의 글입니다.

안초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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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우주변화의 원리" 감상-6

책이라는 것의 가치는 무엇일까? 정보와 즐거움과 가치관의 세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책은 독자에게 정보(지식)를 주거나,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단 그 정보와 지식이 바람직한 가치관에 기반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과학서적이나 철학서는 지식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쓰여진다. 어떤 사람들은 괴롭지만 직업상 읽어야 하고, 어떤 이는 그런 지식의 습득에서 쾌감을 얻기 때문에 읽기도 한다. 한동석의 "우주변화의 원리“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과학서적이다. 더 세분하면 과학적 철학서이다. 저자가 설명하려고 하는 대상이 분명한 책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음양오행“에 대하여 설명하려는 책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음양오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 독자들이 나와야만이 이 책은 그 가치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음양오행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라고 나는 본다. 있다고? 누고? 한번 손들고 나와 봐. 한번 데리고 와바. 얼굴 함 보게.

왜 없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이 책이 나온지 어언 40년이 되어가고, 음양오행의 교과서로 불릴만큼 독보적인 권위를 누리고 있는 데 비해서 이 책을 이론적 토대로 한 후속 연구의 성과물이 한국의 동양학계에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읽었다는 사람은 많은데, 읽고 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더 진일보한 이론과 원리를 밝힌 책이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거나 이 책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음양오행론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 한동석의 제자라 자부하는 이가 누가 있나? 한동석파라는 동양학의 학파가 존재하나?

책이 누리는 권위와 명성에 비해서 그에 걸맞게 따라주어야 할 실질적인 학문적 성과와 후속작업이 전무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은 단 한 넘도 읽고 이해한 넘이 없다는 소리다.

너무나도 난해하고 어려운 탓에 그저 신성불가침한 바이블로 모셔진 책이다. 누가 이 책을 이용하나? 강단에서? 천만에... 일부 자생종교단체들이 자기네 이론서로 써먹고 있다. 그것도 내용이나 이해를 하고 써먹냐 하면 전혀 아니올시다다. 그네들이 종교이론으로 팔아먹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일단 이 책은 정보(지식)의 제공이나 전달이라는 가장 중요한 과학서로서의 기능을 조금도 갖지 못한 책이다. 달리 말하면 책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완전히 무가치한 책이라는 것이다. 즐거움을 준다는 또다른 측면에서도 이 책은 사회일반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읽게 되면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둘 중 하나이다. “띠바, 디기 어렵네, 나 같은 돌빡은 동양학 못 하겠군. 내 주제파악을 못하고 책을 잘못 산거야. 아이고 돈 아까비.” 이게 다수이고, 또 다른 주요한 반응은 “동양학은 역시 씨나락이야, 서양철학이나 과학에 비하면 얼라들 작난질 같애. 유치찬란, 구상유취, 졸렬무비, 아무런 가치 없는 말장난일 뿐인데 공연히 또 사고 말았군. 동양학 하는 넘들은 미친 넘들이야.” 이게 둘이다. 즐거움은 커녕 스트레스와 짜증만 안겨준다.

내 말이 틀리나? “우주변화의 원리”가 동양학계에, 일반학계에, 사회전반에 순기능적으로 기여한 바가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누가 알면 말씀 좀 해 주시지.

아무래도 이 글의 논점을 좀 더 명확히 맑히는 것이 필요할 듯해서 좀 더 부연을 해 드렸다. 다음 회부터 본격적으로 원문의 감상을 계속해 보자.

구름~~

http://blog.naver.com/gktkrk?Redirect=Log&logNo=50007195131




제목: re: "우주변화의 원리" 감상-6 글쓴이: 안초 날짜: 2006.09.12. 17:18:27

네, 중도님!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우주변화의 원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윗글을 읽으면서 느낀 점 몇까지를 써 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음양오행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라고 나는 본다. 있다고? 누고? 한번 손들고 나와 봐. 한번 데리고 와바. 얼굴 함 보게.”

나는 동양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신임이 안 갔기 때문입니다. 뭔가 논리가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 잘 따져보면 중요한 핵심이 모순되어 있고, 그것을 인정하면 지금까지 헛공부를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양학을 공부하시는 분 중에는 공부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이 상당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왜 그런가 하면 대부분은 학문을 傳하는 것이 아니라 말(言)을 옮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양학을 알고 傳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서 옮(遷)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통하지 못한 사람(非人)은 학문을 傳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非人不傳(비인부전)

기백은 `황제내경 소문 기교변대론`에서, "其人不敎 是謂失道 傳非其人 慢泄天寶"(其人은 가르치지 않으면 道를 잃는다고 한다. 非人은 전하여도 오만해져서 하늘의 보물을 누설한다)라고 기인은 道를 가르쳐야 하지만, 비인은 道를 傳해도 오히려 설한다.

그런데 말(言)을 옮기고 옮기다 보면 종국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혀 엉뚱한 말을 옮기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율곡선생은 화담선생을 말(言)을 옮(遷)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평했던 것입니다.

진리와 언문

율곡은 '율곡전서'에서 선조에게, "세상의 이른바 학자라는 사람들이 단지 성현의 학설을 의지하여 모방만 하고 말을 하나 마음속으로는 얻은 바가 없는데, 경덕(화담)은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나아가 스스로 얻은 妙가 있으니 결코 문자와 언어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진리와 언문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평생 남의 말만 옮기면서 헛공부를 했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위 진리와 언문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주신 분이 바로 한동석선생입니다. 만약 한동석선생님의 우주변화의 원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대부분의 사람처럼 말(言)을 옮기고 있거나 아니면 내 스스로 동양학을 포기했을 겁니다.

“왜 없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이 책이 나온지 어언 40년이 되어가고, 음양오행의 교과서로 불릴만큼 독보적인 권위를 누리고 있는 데 비해서 이 책을 이론적 토대로 한 후속 연구의 성과물이 한국의 동양학계에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처음 우주변화의 원리와의 만남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때만 해도 동양학을 꽤나 공부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저 역시 남들처럼 도저히 한 장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하던 책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글의 주제부터가 아무나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소질이 없으므로 동양학을 포기하겠다는 도박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비장한 각오일 뿐 위 책은 쉽게 나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끝에 공부하는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어차피 모를 것이라면 알려고 하지 말고 글자만이라도 읽어서 책장이나 끝까지 넘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해하는 것보다 글자만이라도 끝까지 한번 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이것은 우주변화의 원리 뿐 아니라 원전을 읽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믿고 한번만 해보시면 우주변화의 원리는 분명 심오한 동양학의 세계로 안내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해서 우주변화의 원리 뿐 아니라 원전도 읽게 되신 분이 꽤 있습니다.

위와 같이 시작한 우주변화의 원리라는 책은 나를 송두리 채 잡았고, 나는 얼마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릅니다. 거의 암기할 정도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책이 점점 헐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새 책을 하나 더 샀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산 책도 얼마나 읽었는지 어느새 손때가 까맣게 묻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읽게 되는가 하면 읽을 때마다 새롭게 배우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지금 또 읽어도 또 새로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은 내가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리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해서 행림과 대원의 우주변화의 원리책을 모두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위 공부하는 과정에서 선생이 제시하신 운기학, 주역, 정역 등의 원전도 위 방법으로 읽었으며, 결국은 약간의 깨달음을 정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것이 나의 졸저 ‘中의原理’입니다. 말은 쉽게 하고 있지만 이렇게 나는 10년의 청춘을 흘려보내야 했고, 아직도 그때를 생각만 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래도 나는 행운아이기 때문에 선생을 만나 동양학의 門을 두드릴 수 있었고, 또 그 아류라고 할 수 있는 ‘中의原理’까지 저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반으로 한의학회에서 강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평소 우주변화의 원리를 읽으면서 계획했던 선생의 묘소도 후학들을 데리고 참배할 수 있었습니다.

동양학은 말(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40년이 아니라 400년이 걸려도 위 門에 접근하는 사람조차 만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변화의 원리에 대한 후속 연구의 성과물이 쉽게 나올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성인은 누에 옷을 입고 있다고 한 것처럼 때가 되어야 옷을 벗을 수 있으며, 우리는 이런 분에게 동양학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윗글을 쓰신 분은 말(言)로 하시는 분인지 아닌지 스스로 생각 좀 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양학 공부가 끝났을지는 몰라도, 공부하는 자세는 지금부터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데 하늘에서 뭘 알려 줄 것 같지 않군요.

2006.9.12. 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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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中和)-道名(도명), 노자 도덕경

예전에 TV 요리시간에 요리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알카리에 산성을 섞으면 서로 중화(中和)가 되어 더욱 맛이 좋아집니다."
네! 이것이 중화(中和)입니다. 이것 이해 안 되시는 분 있나요?

그런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것으로 노자 도덕경 반은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道)와 명(名)도 설명합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역도(易道)는 쉽고 단순(易簡)합니다. 단지 그것을 깨닫기 어려울 뿐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위 알카리와 산성을 서로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알카리나 산성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중화(中和)가 덜 된 것입니다. 즉 중화가 되기 위해서는 알칼리와 산성이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맛이 나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상반된 알칼리와 산성은 서로 마주치는 지점이 있게 마련인데, 이곳이 바로 중(中)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새로운 성질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화(和)입니다. 따라서 중화(中和)는 상반된 氣가 서로 和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해 안 되시는 분 있나요?^^

中和(중화)
자사는 ‘예기 중용편’에서,"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至中和 天下位焉 萬物育焉"(희노애락이 아직 發하지 않은 것을 中이라고 하며, 發하여 모두 中에서 節한 것을 和라고 한다. 中은 천하의 큰 本이며, 和는 천하에 達하는 道이다. 中和에 이르러 천하의 位로 만물은 육성된다)라고 중화를 설명한다.

이것을 일월, 남녀 등 상반된 우주, 자연에 비유하여 도(道)로 설명하면...
위 중(中)이 바로 도(道)이고, 위 화(和)가 바로 명(名)입니다.

도(道)는 상반된 기운이 마주쳐 자신을 잃어버린 중(中)의 상태이므로 당연히 맛이 없고(無味), 보이지도  않으며(無視), 들리지도 않으며(無聽), 사용도 할 수 없습니다.(無用)

 無感
노자는 '도덕경 제35장'에서,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道를 입으로 표현하면, 담담하여 맛이  없고, 보려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써도 다하지 못한다)라고 道는 無感하다고 한다.

그런데 위 中에서 자신을  잃는 이유는 상반된  기운이 서로 부딪쳐(沖), 서로 미세하게(精)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잃은 위 미세한 정(精)은 이제 더 이상 상반되지 않으므로 合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화(和)입니다. 그리고 전혀 새로이 창조되는데 이것이 바로 상(象)입니다.

象先
노자는 '도덕경 제4장'에서,  "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粉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道는 沖해서 用하니 혹 不盈한 듯해서 淵함이 만물의 宗이다. 날타로움은 꺽이고, 엄킴은 풀고, 빛은 和하고,  티끌이 함께 하여 가득함이  存하는 듯하다. 나는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지만 象의 帝보다는 먼저 있다)라고 道는 沖해서 象보다 먼저 存한다.

中精
노자는 '노자 제103장'에서,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眞 其中有信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그윽하고 깊숙함이여, 그 中에 精이 들어 있다. 그 精은 매우 참되며 그 가운데 信이 있으니, 옛부터 지금까지 그 名이 떠나지를 않았다. 이로써 만물의 시작을 연다. 내가 어떻게 만물의 시작을 알겠는가. 이것으로써 안다)라고 中精을 설명한다.

그런데 도(道)는 자신을 잃어버린 정(精)이므로, 모두 똑같아 서로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중(中)은 일월에 따라 움직(周行)이게 되므로, 각자 명(名)을 稱할 수 없지만, 글자로는 모두 도(道)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周行
노자는 '도덕경 제4장'에서,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物이 혼성되어 천지보다  먼저 生하였으니, 적막하고 쓸쓸하여 독립되어 고쳐지지 않고, 周行하여 위태하지 않으니, 가이 천하의 母가 될 수 있다. 나는 그 名을 알지 못하지만 글자로 말하면 道라고 한다)라고 道를 정의한다.

그러니까 위 중(中)의 周行은 우주만물에 움직이는 냇물의 길(道)과 같습니다.

川谷
노자는 '도덕경 제32장'에서,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비유컨데 道가 천하에 있는 것은 마치 골짜기 냇물이 강이나 바다에 흐르는 것과 같다)라고 골짜기 냇물이 강이나 바다에 흐르는 것과 같다.  

결국 위 도(道)의 중(中)은 항상(常) 서로 마주치는(沖) 지점이 있게 마련인데, 이것이 화(和)입니다. 즉 위 중(中)에 常이 없다면, 그것은 마주치는 지점이 없기 때문에 화(和)가 아니며, 그것은 중(中)이 될 수도 없기 때문에 도(道)도 아닙니다. 따라서 위 중(中)의 常을 안다면, 우주만물의 도(道)를 밝힐(明) 수 있게 됩니다.

和常明
노자는 '도덕경 제55장'에서, "知和曰常 知常曰明"(和를 아는 것이 常이며, 常을 아는 것이 明이다)라고 和, 常, 明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쯤되면, 노자 도덕경에서 첫화두를 본원과 본체에 두지 않고, 도(道)와 명(名)에서 시작한 이유를 명백히 알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즉 우주만물의 중(中)에는 자신을 잃어버린 정(精)이 주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도(道)입니다. 그리고 위 중(中)에서 항상(常) 沖하여 和하는 곳이  있는데, 여기서 전혀 새로운 象을 창조하게 됩니다. 그런데 위  象은 자신을 잃어버린 도(道)와 달리 각각 구분 지어야 하므로 명(名)을 稱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서 도(道)에서 生한 명(名)이 반드시 있어야 우주를 구분 설명할 수 있게 되므로, 서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후에 비로소 본원과 본체는 명(名)으로 설명이 가능하게 됩니다.

노자 도덕경은 상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편이 도(道)이며, 하편이 덕(德)입니다. 우주원리로 말씀드리면 상편은 天의 도(道)를 설명하고, 하편은 地의 德을 설명합니다. 天의 도(道)는 스스로(自)하는 것이며, 地의 德는 그렇게(然)  따라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道)만 정확히 깨닫는다면, 德은 그렇게 따라서 깨달을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노자는 위 중화(中和) 개념만 알면,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반대로 중(中)과 화(和)를 모르고 노자의 도덕경을 논 할 수 없습니다.

200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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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chaos)와 도(道)

물리학은 크게 고전과 현대 물리학으로 구분된다.
고전 물리학은 뉴톤의 결정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이고, 현대 물리학은 양자론과 카오스이론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최근 학술 발표의 주종을 이루는 학문이 바로 카오스이론이다. 그러니까 카오스이론은 첨단 과학이론 중에서도 최첨단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카오스]그렇다면 카오스(chaos)이론이란 무엇인가.
카오스 이론은 전혀 규칙이 없어 보이는 움직임(비선형)에서 관통되는 하나의 원리를 찾아내는 학문이다. 예를 들어 수증기의 움직임, 파도의 움직임과 같이 전혀 규칙이 없어 보이는 움직임에도 하나의 원리를 찾아내는 학문이다. 즉 우주에는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가설에서 비롯된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一名
왕필은 `논어 리인장`에서, "夫事有歸 理有會 故得其歸 事雖殷大 可以一名擧 總其會 理雖博 可以至約窮也"(무릇 만사는 제자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듯 이치도 모이게 되어 있다. 고로 돌아가는 바를 알기만 하면 규모가 아무리 큰 것이라도 하나의 명칭으로 집약할 수 있다. 모이는 것을 종합하면 아무리 넓은 이치라 해도 간략한 방법을 궁리할 수 있다)라고 복잡한 만유라도 하나로 집약하면 아무리 넓어도 간략해 진다.

[도]그렇다면 도(道)란 무엇인가.
우주는 아무리 복잡해도 하나로 통하는 中의 움직임이 있는데 그것이 도(道)이다. 쉽게 얘기해서 `만물이 하나로 모이는 우주의 길` 이것이 바로 도(道)이다.

觀明一
공자는 `주역 계사하전 제1장`에서, "天地之道 貞觀者也 日月之道 貞明者也 天下之動 貞夫一者也"(천지의 도는 항상 보여주고, 일월의 도는 항상 밝으며, 천하의 움직임은 항상 1이다)라고 천지일월의 도(道)는 항상 함께 움직이므로 결국은 1이다.

[과학의 도]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카오스이론은 과학의 도(道)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양의 도(道)에서 많은 힌트와 소스를 얻고 있다. 즉 카오스이론은 역(易)의 도(道)를 배경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Tao(道의 중국발음)는 서양의 과학자에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동경의 대상이 되어 온 근본의 학문이다. 따라서 작금에 TV에서 유행하는 노자 역시 위 시대적 요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道)의 주인인 동양학자들은 도(道)가 무엇인지 모른다. 아니 도(道)에 관심조차 없다. 도(道)는 쉽고 간단하지만, 결코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득도(得道)란 인간의 한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도 道士가 흔하지를 않았는데 지금이야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렇지만 易人이라면 위 어려운 길을 가야 진정한 易人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자신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 道士를 찾아 삼만리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더 이상 도(道)를 求하려 하지 않는다. 도(道)를 求하기 보다는 도(道)를 作해서, 자신의 이름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후학의 눈과 귀를 멀게 하여, 결국 오류를 가르쳐 평생 헛 공부(虛行)를 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또한 그 후학은 뭔가 잘못된 그 학문을 다시 作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을 후학에게 가르치게 된다. 따라서 作은 作을 낳게 되어, 도(道)는 갈기갈기 찢어져 오늘날과 같이 전요와 법칙이 없는 도(道)가 衰한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죄인]따라서 위 作하는 사람은 도(道)를 衰하게 하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위 죄인은 오늘날보다 이미 학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옛 유명인에게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易人이라면 내가 위 범죄자가 되지 않을까 한번쯤 스스로 반성해 보길 바란다. 필자 역시 위 범죄자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 사람이다.

逃罪
일부는 `정역`에서, "一夫敬書 庶幾逃罪乎"(일부 공경하여 쓰니 거의 죄를 면할 것인가)라고 罪를 얘기한다.

[동양학]따라서 동양학 공부를 함에 있어서, 위 오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동양학을 공부할 수 있는 최대의 관건이다. 그래서 30년 공부한 사람보다 3년 공부한 사람이 훨씬 훌륭한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옛부터 좋은 스승과 좋은 책을, 동양학 공부의 선결 조건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름에 從하지 말고 진리에 從하라!

위와 같이 역학의 도(道)는 衰해 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도(道) 즉 카오스이론은 盛하고 있다.
이제는 바야흐로 서양에서 도(道)를 수입해야 할 때에 이른 모양이다.
에구~ 쪽... 팔려라!

200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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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恍惚)-깜박깜박(일원성)

恍惚(황홀)
노자는 '노자 제21장'에서,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道에서 物은 있는 듯 없는 듯 황홀하고, 홀과 황의 그 中에 象이 있고, 황과 홀의 그 中에 物이  있다)라고 홀황과 황홀의 中에 물과 상이 있다.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분명히 우주를 그리고 있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 글이 끝날 때쯤이면, 정말 우주가 이렇게 황홀하게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위 문장에 대하여 몇까지 기초 설명을 합니다.

道는 宇宙心을 말합니다.
道는 有無로구분하는데, 恍은 공간(有), 惚은 시간(無)입니다.
易道은 우주공간을 物形象의 3차원으로 구분합니다.
즉 3차원은 物(입체), 2차원은 形(면적), 1차원은 象(선)입니다.

그러니까 위 말을 오늘의 말로 의역하면...
"우주심에서 3차원공간은 환상적으로 공간과  시간이 어울어져 황홀하다. 시간에서 공간이 펼쳐질 때 그 가운데는 1차원 공간이 있고, 공간에서 시간으로 펼쳐질 때 그 가운데는 3차원 공간이 있다."

어떻습니까?
과학은 공간을 선, 면적, 입체의 3차원으로 분류하는 것을 볼 때... 오늘날 우리 과학의 수준으로  보아도 전혀 하자가 없는  말입니다. 아니 과학보다 명료하지요. 그래서 서양과학자들이  역학이나 도학에서 소스를 얻는 것입니다.

위 物形象의 구분은 주역 계사전을 근거로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위 계사전에서 2차원의 形을 기준으로  形而上은 象이고, 形而下는  器(物)라고 한 것입니다. 노자가 위에서 中(形)을 기준으로  설명한 것과 일치하지요. 그러니까 실제로 우주는 中(形)을 기준으로 1차원에서 3차원으로, 3차원에서 1차원으로 이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황홀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너지 측면에서 다시 살펴봅니다.
에너지는 곧 질량입니다.(에너지 등가의 법칙)
에너지는 聚散할 뿐이지 사라지지 않습니다.(에너지 보존의 법칙)

그러니까 위 1차원에서 3차원으로 바뀌면서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3차원에서 1차원으로 바뀌면서 에너지를 내보냅니다. 즉 황홀은 에너지가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형광등은 연속으로 밝은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깜박깜박 합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속으로 에너지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움직입니다. 과학의 양자론에 양자라는 것도, 바로 불연속적인 에너지 다발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주의 에너지는 불연속적으로 깜박깜박합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깜박깜박하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심장입니다. 심장은 밖으로 꺼내놔도 자기 스스로 깜박깜박 움직입니다. 크게는 태양도 흑점이 폭발하며 까~암빡 까~암빡합니다. 아마 태양계도 까~아~암빡 까~아~암빡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한번 상상해 보세요.
데모를 한다고 서울역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 있는데, 모두 깜박깜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주도 깜박깜박하고, 강아지도, 형광등도, 자동차도... 온통 깜박깜박하니 성인이 볼 때는 이것보다 황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노자는 황홀하다고 표현한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위 깜박깜박의 움직임에 규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동조합니다. 제가 올린 글 중에, 깜박깜박하는 반딧불이 처음에는 달라도 나중에는 서로 일치한다라고 이차크 베도프의 글을 인용하여 올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위 데모하는 사람이 모두 다르게 깜박깜박할 것 같지만, 결국은 거의 일치합니다. 아니 크게는 우주심에서 깜박이는 것과 일치합니다. 이것을 과학에서 공명화 현상(시간), 프랙탈 구조(공간)라고 합니다.

위 황홀한 것이 동조하는데는 분명히 규칙이 있습니다.
易에서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하며, 그 결과를 길흉화복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위 규칙만 알 수 있다면, 실제적으로 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러면, 위 규칙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위 규칙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위 황홀의 깜박깜박을 리더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에너지가  가장 강하고(공간), 빠른 속도(시간)에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살이가 불빛에 모여들 듯이... 그러니까 결국은 가장 강하고(공간), 빠른(시간)  속도인 우주심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에서는 위 우주심을 자미원이라하며, 강함을 측정하는 것이 중화이며, 움직임을 측정하는 것이 괘효입니다. 그래서 운명의 예지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이 좋다고 얘기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위 에너지가 가장 강하고(공간), 빠른 사람(시간)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위 계사전에서 憧憧(동동/자주자주/깜박깜박) 往來하면 벗이 너를 쫒는다고 했습니다.

어때요?
우리 성인들의 말은 황홀하지요...

200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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